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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례용 임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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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91155802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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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A5
전영우 지음/조계종출판사

[ 책 소개 ]

 

조선시대 의례용 임산물을 추적하다 보면

조선 산림이 황폐화된 아픈 역사가 낱낱이 밝혀진다

 

조선의 의례용 임산물

 

최근 환경의 중요성으로 탄소 중립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여기에 우리 산림의 가치와 중요성을 제고하는 노력이 진지하게 수반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이 물음이 중요한 이유는, 조선시대 당시에도 산림정책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탁상공론에 머무르거나, 그저 법을 준수하고 폐단을 살피자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그치는 바람에 이후로 산림의 황폐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소나무 박사’로 잘 알려진 국민대 전영우 명예교수는 지난 30년 동안 천착한 주제인 18세기 조선을 강타한 산림 황폐의 발생 원인을 규명하는 노력 끝에 황장(소나무), 율목(밤나무), 향탄(숯) 같은 조선 왕실의 의례용 임산물이 중요한 실마리를 쥐고 있음을 밝혀냈다. 이들 의례용 임산물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조선 왕실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등재된 수백 건의 기사로도 충분히 확인된다. 반면 조선 조정은 일반 백성이 사용하는 관재나 목재, 땔감의 수급에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저자는 이처럼 왕실과 백성을 구분 짓는 차별적 산림정책이 조선 후기에 어떻게 산림 황폐화로 이어지는지를 추적해나간다.

산림학자의 집요한 추적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조선의 의례용 임산물』은 조선 산림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그 때문에 우리가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 출판사 서평 ]

 

울창했던 조선 숲이 황폐화된 것은

왕실과 백성을 구분 짓는 차별적 산림정책에서 비롯됐다

 

산림 황폐화에도 왕족의 의례용 임산물만은

차질 없이 조달해온 조선의 산림정책

 

이 책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황장(소나무), 율목(밤나무), 향탄(숯) 같은 조선 왕실의 중요한 의례용 임산물에 초점을 맞춰 울창했던 조선 숲이 어떻게 황폐화되었는지를 역사적 사실 자료에 기반해 낱낱이 조명한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시신을 화장해서 유골을 사찰에 안치하는 불교식 장례의식이 성행했던 데 반해, 조선은 건국 초부터 성리학적 통치 이념에 따라 국가를 운영했고 『주자가례』의 매장식 장례 방식에 따라 소나무로 된 관이 왕실 장례의 필수품이 되었다. 그에 따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소나무 관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육친에 대한 효도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왕실 장례에 필요한 의례용 임산물 조달에는 헌신을 다한 것과 달리, 일반 백성이 장례에 사용하는 소나무 관재는 물론이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목재와 땔감의 수급에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산림 황폐화가 본격화된 18세기에 이르면 관재 값이 4~5배나 급등하고, 백성들이 가장 저렴한 관 1부(部)를 사려면 밭 600평(4마지기)을 살 수 있는 금액인 50냥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왕실의 상황은 달랐다.

 

산림 황폐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조선 조정이었지만, 왕족의 관곽재로 사용될 황장목만은 조선 말까지 차질 없이 조달했다. 조선 말 엄혹한 시기에 제작된 황장목 관 2부(部) 가운데 1부는 이방자 여사의 1989년 장례에 사용되었고, 다른 1부는 2005년 그의 아들 이구(李玖)의 장례를 위해 남겨두기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_5쪽

 

대체 왜 조선 조정은 왕족의 관재 조달에 활용한 방법을 백성들을 위해서는 활용하지 못했을까? 심지어 산림 황폐가 심화한 조선 후기에도 왕실의 의례용 임산물을 조달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음에도 국가 재정과 안보에 필수 불가결한 조선재는 왜 제대로 조달하지 못했을까?

이 책은 조선 조정이 임산물 조달에 있어 백성을 위해서는 무능했지만 왕실을 위해서는 유능했던, 그 차별적 산림정책이 조선 후기에 발생한 산림 황폐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지 면밀하게 밝혀낸다.

 

차별적 산림정책과 함께 간과할 수 없는

부실한 조선의 톱 제작 기술

 

이 책에서 눈여겨봐야 특이점을 하나 더 꼽자면, 차별적인 산림정책의 시행과 함께 조선의 톱 제작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점을 조선 산림의 황폐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제재용 톱 제작 기술이 없었으며, 부실한 톱이 목재 생산과 유통에 영향을 끼쳐 관재 값의 폭등을 불러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내용은 그동안 학계에서도 논의된 바가 없기에 자칫 도발적인 주장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30년 넘게 산림학 분야에 천착해온 연구자답게 임산물 이용에 있어 목공 도구의 역할과 그 중요 성을 폭넓게 조망했다. 아울러 조선과 일본의 사례를 통해 근대 톱의 제작 기술이 목재 수요와 이용 측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함께 살폈다.

목재 생산과 유통과 소비 체계가 구축된 일본과 달리 조선은 약탈적 임업으로 목재 생산을 지속적으로 꾀할 수 없었고, 지방의 장시에서 거래되는 목재의 종류도 송판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제재용 톱이 부실한 까닭에 판목을 다듬어 6~9cm 두께의 송판을 켜는 데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관 값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방에서 제재 톱의 수요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_117쪽

 

저자는 조선에서 근대 톱 제작 기술이 부실할 수밖에 없는 배경으로 1) 목재 축조가 아닌 온돌 난방을 채택한 건축 양식 2) 도시화 비율에 따른 낮은 목재 수요 3) 수급이 원활하지 못한 목재 유통 4) 미비한 상업자본 축적 등을 살피면서, 소나무 자원의 고갈과 함께 산림이 황폐된 원인을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진단했다.

 

 

이 책의 구성

 

1에서는 소나무가 조선시대 왕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의 관재로 자리 잡게 된 긴 여정을 살핀다. 이와 함께 관재를 조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폐단들과 이를 막기 위한 조선 조정의 노력, 그럼에도 소나무 관재가 산림 황폐에 끼친 영향들을 차례로 살펴본다.

2에서는 조선 후기 관의 가격이 400~500냥에 달한 이유가 산림 황폐로 인한 소나무 자원의 고갈과 함께 조선에서 제재용 톱을 생산(개량)하지 못한 점도 간과할 수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조선과 일본 사례를 비교하며 제재용 잉거톱 제작 여부를 살펴본다.

3에서는 조선 조정이 왕실 제례 품목 가운데 하나인 위패(위판)를 만들기 위해 밤나무 목재를 국용주재로 지정하면서, 밤나무를 어떻게 확보하고 조달했는지를 살핀다. 그 과정에서 18세기에 심화한 임산자원 고갈에 대처하고자 호남과 영남의 사찰림들을 활용한 배경 등을 고찰한다.

마지막 4장에서는 조선시대 성리학적 통치행위에 있어서 왕족의 유택인 능·원·묘에 쓸 숯과 제향(祭享) 경비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왕, 후궁, 왕자 등에게 배정된 향탄산을 살펴본다. 하지만 늘어나는 능침의 수요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지자 한양 인근이 아닌 강원도와 전라도, 경상도까지 향탄산을 배정하면서 날로 심화되는 산림 황폐화에 백성들까지 곤궁해지는 상황이 이어지고, 이를 위해 각 지역의 사찰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향탄봉산을 관리한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해본다.

 

[ 지은이 ]

 

전영우(全瑛宇)

 

1951년 경남 마산 출생.

고려대학교 임학과와 대학원에서 산림학을 전공했다. 산림청 임목육종연구소에서 5년간 근무한 후, 미국 아이오와주립대학에서 산림생물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민대학교 산림자원학과 명예교수와 (재)동숭학술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문화의 창으로 숲을 읽고 해석하여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그의 글이 실린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그가 쓴 여러 권의 저작은 대한민국 학술원, 환경부, 문화관광부, 서울시교육청, 한국출판인회, 간행물윤리위원회, 환경정의시민연대, 동아일보, 문화일보,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교사들(책따세)’ 등의 추천도서나 우수도서, 세종도서로 선정되는가 하면, 불교출판문화상, 가장 문학적인 학자상 등을 받기도 했다.

저서로는 《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 《숲과 한국문화》, 《나무와 숲이 있었네》, 《숲 보기 읽기 담기》, 《한국의 명품 소나무》, 《궁궐 건축재 소나무》, 《한국의 사찰 숲》, 《송광사 사찰 숲》, 《우리 소나무》, 《한 산림학도의 글쓰기》 등이 있고, 그 밖에 《森と韓國文化》(일본어판), 《The Red Pine》, 《Forests and Korean Culture》(영어판) 등을 펴냈다.

[ 차례 ]

 

머리말

 

1장 황장 소나무

  1. 상장례의 규범이 된 소나무 관재
  2. 소나무 관재 수급
  3. 조선의 소나무 관재 수급 정책
  4. 시대별 관재 가격과 상대적 가치
  5. 소나무 관이 조선 후기 산림 황폐에 끼친 영향
  6. 맺음말

 

2근대 톱이 목재 이용에 끼친 영향

  1. 조선과 일본의 근대 톱
  2. 조선의 제재 톱 제작
  3. 일본의 제재 톱 제작
  4. 1인용 제재 톱, 마에비키 노코기리
  5. 조선의 제재용 톱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6. 맺음말

 

3장 국용주재, 율목

  1. 위판의 규격
  2. 위판의 조달 부서와 조달 방법
  3. 분작제에 의한 밤나무 위판 조달
  4. 봉산 지정(도작제)에 의한 밤나무 위판 조달
  5. 송광사 율목봉산의 지정과 운영
  6. 송광사 율목봉산의 위판 제작
  7. 맺음말

 

4장 향탄(香炭)

  1. 능원의 향탄산
  2. 향탄산의 황폐화
  3. 사찰의 향탄봉산
  4. 탄봉산과 향탄봉산
  5. 맺음말

 

5장 결론

 

부록_ 조선시대 왕실 고문서 ‘봉산(封山)’

주석

찾아보기

[ 책 속으로 ]

 

조선은 매장 장례를 장려하기 위해 왜 소나무를 관곽재로 선정하였을까? 조선 지배층은 주자 상제를 충실하게 따르기 위해 소나무를 관재로 선정하였겠지만, 목재 이용 측면에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먼저 소나무는 주변에서 대량으로 쉽게 구할 수 있고, 생육환경에 강한 적응력으로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며, 쐐기에 잘 쪼개지는 재질 특성을 보유하여 판재 제작이 용이하고, 세 아름(三抱)만큼 굵게 자라는 수종이었기 때문이다. _34쪽, ‘1장 황장 소나무’ 중에서

 

조선은 국가의 통치 이념을 성리학에 기반을 두었기에 상례를 중시했고, 왕을 비롯한 왕족의 장례에 필요한 황장목 관곽재의 안정적 조달과 비축을 중시했다. 따라서 장생전은 국왕이 즉위하면 즉시 관재 10부를 미리 제작하여 보관하였고, 매년 옻칠을 덧칠하여 나무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10부의 관재를 미리 비축해두는 제도는 영조 대에까지 지속되었지만, 조선 말기에 이르면 5부로 줄어든다. 비축 물량이 줄어든 이유는 산림자원 고갈로 인해 황장목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한 탓도 무시할 수 없다. _49쪽, ‘1장 황장 소나무’ 중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궁핍한 국가 재정과 해이한 행정력으로 곳곳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그와 동시에 점차 심화한 산림 황폐는 관재 가격을 상승시켜 지방 곳곳에서 불법적인 소나무 벌목을 일으킨다. 실록은 경기, 강원, 경상도에서 발생한 불법적

소나무 벌목과 송판 거래를 기록하고 있다. _73쪽, ‘1장 황장 소나무’ 중에서

 

황장목이 왕실의 재궁과 대신의 관재로 사용됨에 따라 일반 백성의 장례에도 송판으로 만든 관이 상례의 규범이 되었다. 그 결과 사대부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의 장례에도 소나무 관이 일상화되었다. 소나무 관재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발생한 산림 황폐화의 부작용은 관재 값의 급등으로 나타났다. 조선 왕실에서 500년 동안 애용한 황장 소나무 판재로 만든 재궁이 조선 사회의 산림 이용에 끼친 부정적 영향은 앞으로 더 폭넓게 고찰되어야 할 과제이다. _97쪽, ‘1장 황장 소나무’ 중에서

 

조선 사회는 유교적 통치 이념에 따라 상업을 천시한 결과 상업자본의 축적이 쉽지 않았다. 이와 달리 일본은 봉건 체제로 통치되어 17~18세기에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할 수 있었고 상업자본도 축적되었다. (중략) 목재 생산과 유통과 소비 체계가 구축된 일본과 달리 조선은 약탈적 임업으로 목재 생산을 지속적으로 꾀할 수 없었고, 지방의 장시에서 거래되는 목재의 종류도 송판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재 톱 수요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_119p, ‘2장 근대 톱이 목재 이용에 끼친 영향’ 중에서

 

태조는 『주자가례』를 국가의 의례로 채택하고, 한양 천도와 함께 종묘와 성균관을 설치하였으며, 1406년 성종이 전국 주현에 사직과 향교를 설치함에 따라 전국 고을과 각종 제사에 필요한 위패도 늘어났다. 또한 조선 건국과 더불어 전국 산천에 지내던 제사용 위패의 수요도 함께 늘어났다.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은 밤나무 주재를 공신과 재신에 원활하게 공급하는 일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_127쪽, ‘3장 국용주재, 율목’ 중에서

 

조선 말까지 계속해서 왕실이 율목을 조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백 년 동안 동일 업무를 담당한 봉상시가 존재했고, 현장에 파견하여 관련 업무를 총괄 감독하는 율목경차관 제도가 유지되었으며, 주기별 식년 벌채 등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적 규범은 조선재 같은 국용재 소나무 조달과는 궤를 달리하였기에 율목 조달은 지속될 수 있었고, 조선재 조달은 지속되지 못했다. _161쪽, ‘3장 국용주재, 율목’ 중에서

 

19세기 초, 산림 황폐로 능침의 향탄산이 민둥산이 된 사정은 또 있다. 장릉의 향탄산에 매장을 허락하고 면세한 뒤로 산기슭 네 곳이 민둥산으로 변해서 숯을 만들 곳이 없다는 1805년 장릉 향탄산에 관한 기록이 있다. 나무를 심지 않고 계속된 약탈적 산림 이용의 결과는 참혹한 산림 황폐와 임산자원 고갈이었다. _186쪽, ‘3장 국용주재, 율목’ 중에서

 

19세기 말에 사찰은 왜 향탄봉산의 획정을 스스로 자임했을까? 조선 말기의 엄혹한 시대 상황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불교계가 겪은 당시의 시대 상황은 『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 편찬을 주관한 금명보정 스님의 연보란에 “부패한 세도가들과 못된 유생들과 무법한 주민들의 횡포로부터 사찰림을 지키기 위해 1829년(순조 29년)에 혜준대사의 알선으로 송광사의 산림을 율목봉산으로 칙정되게 함으로 송광사의 산림과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향탄봉산이 1880년부터 20여 년 동안 집중적으로 시행된 이유는 향탄산의 산림 황폐로 각 능원의 제향 경비를 쉬 조달할 수 없었던 왕실은 물론이고, 부과된 막중한 요역을 감면받고 왕실의 권 위를 빌려 주변 산촌 주민들에 의한 사찰림의 도·남벌과 산지 훼손을 막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던 사찰의 이해관계가 부합했기 때문이다._197쪽, ‘4장 향탄’ 중에서

 

향탄산 부근에 사는 주민들이 부담한 과도한 징세액은 화전과 산림 개간을 촉진하였고 결과적으로 산림 황폐의 동인이 되었다. 능원의 재원 충당을 위해 장기간 지속된 향탄산의 약탈적 이용 역시 산림 황폐를 불러왔고, 산림 황폐는 유민을 증대시켜 결국 타지방의

산지를 다시 화전·개간으로 황폐화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었다. _202쪽, ‘4장 향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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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4.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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