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묻어둔 이야기
-나의 스승 일엽스님-
| 구술. 월송스님 정리. 조민기 | 판형 152*215 |
| 페이지 263쪽 | 가격 18,000원 | 출판사 민족사 |
| 분야 불교>불교일반 | 발행일 2024년 10월 2일 | ISBN 979-11-6869-077-6 (03220) |
김일엽은 누구인가
1896년생.
최초 신여성이자 문인,
최초 동아일보 여성 기자, 최초 여성잡지 <신여자> 창간,
그리고 자유연애.
당대 스캔들 메이커 ‘김일엽’
1920년대 당시 이슈 메이커이자 셀럽으로 주목받던 김일엽.
1933년 인생을 불교계로 전향한다.
걸출한 여장부인가? 스캔들 메이커인가?
일엽스님의 친모 이마대 여사는 외동딸 김원주를 ‘열 아들 안 부러운 대장부’로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이마대 여사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딸을 학교에 보냈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김원주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차별에 의구심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김원주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빼어난 감수성과 문학 재능을 갖춘 그녀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귀국 후 <신여성> 창간, ‘신여성 1세대’라는 ‘걸출한 여걸’로 사회적 이슈를 주도하며 문인으로, 여성해방운동가로 활약했다.
선구자로서 찬사도 있었으나 김원주가 ‘열 남자 안 부러운 대장부’다운 모습을 과시한 분야는 연애였다. 젊은 날, 김원주는 가십과 루머,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명성을 떨치며 감탄과 비난을 몰고 다녔다. 특히 이혼과 <신여자>의 폐간 이후 자유연애주의를 몸소 실천하며 일과 연애 모두를 놓치지 않았다.
일엽 김원주에서 비구니 일엽으로
목사의 딸이었던 김원주는 만공스님이라는 큰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으며 익숙한 것 같으나 사실을 알지 못했던, 불교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런 김원주를 불교로 이끌어준 스승이자 연인이 있었으니 바로 백성욱 박사다. 백성욱 박사와의 이별 후, 김원주는 재혼과 이혼을 거쳐 마침내 출가하였고, 만공스님이 계신 수덕사로 입산한다. 만공스님은 일엽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인가와 전법게를 내리며 당부했다.
“일엽이 백련처럼 성품이 바뀐 후에 세상에 나서라.”
오랜 세월, 글로 세상과 소통했던 일엽스님은 스승의 뜻에 따라 주저 없이 절필하였고 승가 안에서 아무런 지위도, 직책도 맡지 않았다. 일엽스님이 30년 동안 놓지 않았던 것은 오직 하나. 견성암의 ‘입승入繩(절에서 기강을 맡은 소임)’이었다.
30년 절필을 깨고 탄생한 베스트셀러
만공스님이 열반하신 지 15주년이 되던 1961년, 스님은 하늘 같고 바람 같은 스승을 마음껏 기리는 글을 썼다. 그로부터 다시 14년 후, 일엽스님은 손상좌 월송스님과 함께 보따리 속에 넣어두었던 원고들을 꺼내어 백성욱 박사가 환희대로 보내준 새 원고지에 정리하였다. 그것이 세간에서 삶을 뒤돌아본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이었다. 이어 <청춘을 불사르고>(1962),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1964)를 발표하였다.
오랜 시간, 세속에서 모습을 감췄던 일엽스님의 글이 발표되자 세상은 다시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동시에 잊힌 줄 알았던 온갖 스캔들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들을 사칭해 조잡한 책을 파는 이들이 등장했고, 쓰지도 않은 가짜 자서전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호들갑 떨 것 하나 없다. 김일엽 이름 석 자가 뭐라고”
월송스님은 일엽스님을 보필하며 스승의 글이 세상에 반듯하게 나오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의 모든 역할을 했다. 스승을 곁에서 보아온 월송스님과 정진스님은 일엽스님의 이름을 팔며 스님을 모욕하는 이를 직접 목격하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노스님 큰일 났어요! 웬 남자가 노스님을 빙자하고 이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기가 스님의 사생아라고 하며 책을 팔고 다닙니다. 이 노릇을 어쩌면 좋아요.”
억울함을 견딜 수 없어 눈물을 흘리는 손상좌들을 본 일엽스님은 말했다.
“호들갑 떨 것 하나 없다.”
스님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정진스님과 월송스님은 눈물 젖은 얼굴로 스님을 보았다. 이렇게 큰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호들갑 떨 것 없다니 무슨 말씀이실까.
“김일엽이라는 이름 석 자가 뭐라고? 그 이름이 대체 뭐길래? 그 이름 가치가 얼마나 된다더냐? 나를 빙자하여 한 사람이 이 힘든 생을 버티고 한 남자가 장사하고 돈을 벌어 그걸로 생활을 할 수 있으면 내가 한 사람을 구제한 것이 아니냐?”
하지만 월송스님과 정진스님으로부터 사건을 전해 들은 일엽스님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담담할 뿐이었다. 일엽스님은 자신의 이름이 한 중생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깟 소문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시시비비를 다투지도 않았고, 진실과 거짓에 대해 해명하지도 않으셨다.
화려한 소문에 가려졌던,
비구니 선사이자 수행자 일엽스님의 진짜 이야기
일엽스님이 돌아가시고 나자 온갖 소문들이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돌아다녔다. 소문의 대부분은 생전에 버젓이 서점을 차지한 채 불티나게 팔리던 가짜 자서전 류의 이야기들이었다. 스승이 입적한 후 묵묵히 진실을 지키고 있었던 월송스님과 환희대 문중은 소문이 아니라 꼭꼭 묻어두었던 스승의 진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이야기에 대한 해명이 아닌 ‘이렇게 묻혀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통해 수행자 일엽스님을 최초로 재조명하는 것이다.
진실을 밝히고 싶은 제자,
최초 승복 입은 대학생이었던 월송스님
월송스님은 일엽스님 문중 제자 중 최초의 대학생이자 동국대학교에 승복을 입고 다닌 최초의 스님이다. 월송스님은 동국대학교 장학생 입학을 권유하는 백성욱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이 불교대학에 다니면서 승복을 입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승복을 입고 대학에 다닐 수 있다면 스승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월송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일엽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승복을 입고 대학에 다니는 것이라면) 의의가 있다. 가라, 대학에.”
일엽스님의 허락으로 최초의 승복 입은 대학생이 되었던 월송스님은 스승이 떠난 지 27년 후, 수행자 ‘일엽선사’의 면모를 담은 <일엽선문>을 펴냈다. 비구니 선사 일엽스님을 위해 월송스님은 스승에 대한 추억을 마음 깊이 꼭꼭 묻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27년 후, 스승과의 보석 같은 시간을 떠올리며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드디어 세상에 꺼내놓았다.
<꼭꼭 묻어둔 이야기 – 나의 스승 일엽스님>은 소문과 가십의 주인공이며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당시 세간의 시선, 편견, 모멸을 어떻게 견뎌내었는지, 어떻게 극복해서 주변을 감화시킬 수 있는지 그 생생한 목격담이라 할 수 있다. 김일엽의 변화를 이끈 것은 스승과 불교 그리고 제자들이었다. 일엽스님의 이름에는 승화된 백련도엽의 향기가 서린다.
일엽一葉
스스로를 내던져 불교가 되었고
불교의 가치와 메시지를 구현하다.
소문이 구전처럼 떠돌면 그곳에 ‘백련도엽’의 향기가 머문다.
아는 것 같지만, 몰랐던, 이것이 바로 일엽스님의 이야기이다.
구술. 월송(月松)스님
김일엽 기념 도량으로 환희대를 중창, 원통보전, 보광당, 난야 등을 건립하였으며 김일엽 문화재단을 창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속명은 이송량. 순천시장을 지냈던 이옥로 님과 아내 진순임 님의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1957년, 순천여고 졸업 후 일엽 노스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입산하였고, 경희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960년, 백성욱 박사의 추천으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최초의 승복 입은 대학생이 되었다. 견성암 불사 당시 6년 동안 화주를 맡아 포교 법극 〈이차돈의 사(死)〉를 성공시켰다. 같은 시기 일엽 스님의 저서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가 연달아 출간되었다. 견성암 불사 후 교토 불교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일엽스님 입적 3주기를 맞아 유고집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을 입적 30주기를 기념하여 〈일엽선문〉을 출간하였다.
정리. 조민기
한양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했다. 역사 속 숨겨진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역사 작가이자 경전 속 보배 같은 인물을 찾아다니는 불교 작가이다.
저서로 〈조선 임금 잔혹사〉, 〈조선의 2인자들〉, 〈조선의 권력자들〉, 〈궁녀로운 조선시대〉 등이 있으며 불서 〈부처님의 십대제자 – 경전 속 꽃미남 찾기〉, 그림동화 〈친구들 만나러 왔어요〉, 육아 에세이 〈아기 부처 엄마 보살〉 등이 있다.
◉ 작가의 말. 10쪽
이 책에는 수행자 일엽스님이 말년에 환희대에서 머무셨던 시절, 다시 글로 포교를 하셨던 이야기 그리고 견성암에서 입적에 드신 후 최초의 전국 비구니장으로 치러졌던 장례식까지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일엽스님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노스승을 곁에서 모셨던 손상좌 월송스님이 들려주신 일엽스님의 이야기는 따뜻한 감동과 서늘한 경책 그리고 감히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선지식으로서의 풍모가 가득하다.
◉ 결혼 그리고 ‘일엽一葉 ’. 40쪽
이광수는 ‘일엽一葉’이라는 필명이자 호를 지어주었다. (중략) ‘일엽一葉’이라는 필명은 김원주가 태어난 1896년 세상을 떠난 일본의 여류 문인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의 히구치 이치요가 되라며 필명을 지어준 이광수를 만났을 때, ‘일엽’ 김원주는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늘 홀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온 김원주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다. 이들의 인연은 훗날 스님의 인생에서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 여자 김원주에서 인간 김일엽으로. 50쪽
백성욱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일엽 김원주는 생애 처음으로 완전한 사랑을 느낀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져 버린, 조건도, 삶과 죽음조차 초연해지는 숭고한 사랑이었다.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운명의 반쪽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행복을 감추지 못했다. 백성욱 박사와 함께 부부가 되어 함께 깨달음을 성취하는 불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장의 편지만 남기고 사라진 백성욱 박사로 인하여 모든 꿈은 부서지고 말았다.
(중략)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사랑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또 감화시킬 수 있는 최상의 포교 방법이라는 것을 이 시절의 일엽 김원주는 알았을까. 하지만 훗날 입산하고 30년이 지난 어느 날, 스님은 사랑으로 장엄한 글을 방편으로 삼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가장 솔직하고 간절하게 전했다.
◉ 다투지 않고, 변명하지 않는다. 68쪽
일엽스님이 입산하여 견성암에서 입승직을 하자, 먼저 와서 정진 중이던 비구니 수좌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파란이 있었다. 특히 동진 출가하여 공부하던 스님들은 속세에서 다양한 활약을 펼치며 결혼까지 하고 산중으로 들어온 일엽스님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일엽스님은 이 또한 인욕 수행으로 여기며 태연하게 시선을 받아냈다. 출가자들의 따가운 시선이 오히려 수행의 동력이 된 것이다. 그 모습과 근기를 보신 만공스님은 일엽스님의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 확인하신 후 일엽스님이 승속 경계를 완전히 넘어섰음을 인정하며 기쁘게 말씀하셨다. “일엽이가 지견이 났구나! 일엽이가 지견이 났어!”
◉ 입승스님 입승스님. 116쪽
“죽비를 30년 동안 놓지 않고 계속 공부하셨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하도 오랫동안 입승직으로 사셨기 때문에 ‘입승스님, 입승스님’ 해서 누구나 ‘입승’이라는 말 자체가 ‘(일엽) 스님’의 이름(법명)인 것으로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입승’이라는 것은 하나의 소임이었더라고요. 저희들도 뒤늦게 알았습니다.” (김일엽문화재단 이사장 월송스님 인터뷰 중)
◉ 낡은 보따리 속 종이 뭉치. 124쪽
노스승과 어린 제자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보따리에 가득했던 종이 뭉치의 글들을 한 장 한 장 정리해 갔다. 1960년, 출가 수행자로서 일엽스님이 세간에서 삶을 되돌아본 이야기를 담은 첫 번째 저서 <어느 수도인의 회상>이 동국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되었다. 30여 년 만에 나온 책은 다시 세상을 뒤흔들었다. 일엽스님의 고요하고 잔잔한 사자후였다. 이어서 일엽스님은 <청춘을 불사르고>(1962),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1964)를 연달아 세상에 발표하며 그야말로 중생을 널리 교화한다.
◉ 이제야 인정하네. 160쪽
“노스님 큰일 났어요! 웬 남자가 노스님을 빙자하고 이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기가 스님의 사생아라고 하며 책을 팔고 다닙니다. 이 노릇을 어쩌면 좋아요.” “이것 좀 보세요! 제대로 된 책도 아니에요. 게다가 들고나온 건 이미 덤핑된 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노스님 얼굴에 먹칠하고 다니는 이가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억울함을 견딜 수 없어 눈물을 흘리는 손상좌들을 본 일엽스님은 말했다.
“호들갑 떨 것 하나 없다.”
“김일엽이라는 이름 석 자가 뭐라고? 그 이름이 대체 뭐길래? 그 이름 가치가 얼마나 된다더냐? 나를 빙자하여 한 사람이 이 힘든 생을 버티고 한 남자가 장사하고 돈을 벌어 그걸로 생활을 할 수 있으면 내가 한 사람을 구제한 것이 아니냐?”
◉ 유전자 검사를 해보시지요! 166쪽
대중의 호기심에 여여하게 대처하는 스님의 성품을 지독하게 이용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스님의 아들을 사칭한 인물이 등 장한 것이다. 김태신 혹은 일당스님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는 일본인 오타 세이조와 일엽스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일엽스님과 오타 세이조가 모두 세상을 떠난 후에 이러한 말들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김태신은 심지어 책까지 출간하여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 책에서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세하게 서술한다.
그동안 자신이 일엽스님의 아들이라고 사칭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스님이 돌아가신 후 스님의 지인까지 등장한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 발간사 경완스님(김일엽문화재단 부이사장)
◼ 추천사 주경스님(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 작가의 말 어느 날의 농담 혹은 선문답禪問答
◼ 프롤로그 “봐라, 스님께서는 자유자재하셨다. 조사열반하셨구나!”
1부 일엽 김원주
소녀 시절 / 여자라고 종노릇만 해야 하오? / 천지에 외톨이 되다 / 아버지의 재혼과 죽음 / 결혼 그리고 ‘일엽一葉’ /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 그리고 이혼 / ‘참 다행한 일’ / 운명처럼 나타난 ‘B’ / 여자 김원주에서 인간 김일엽으로
2부 비구니 일엽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라! / 금강산 마하연에서 / 다투지 않고, 변명하지 않는다 / 기쁨의 노래 / 불도佛道를 닦으며
3부 일엽스님과 제자들
만공스님이 맺어준 인연, 경희스님 / 정진스님의 인욕바라밀 / 집을 떠나다, 월송스님의 출가/ 올깎이와 늦깎이 / 환희대, 휘영청 달빛이 좋고도 좋도다! / 월송月松, 소나무에 달이 뜨면 금상첨화지!
4부 인연
글을 아주 단념할 수가 있겠는가? / ‘입승스님, 입승스님’ / 낡은 보따리 속 종이 뭉치 / 일엽스님의 편지 1 / 백성욱 박사의 전생 이야기 / 출가를 꿈꾸던 여고생 / 승복을 입은 대학생
5부 소문과 거짓말
이제야 인정하네! / 일엽스님의 편지 2 / 일엽스님의 편지 3 / 호들갑 떨 것 하나 없다 /
수덕사의 여승 / 유전자 검사를 해보시지요! /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사랑, 그리움–175
6부 견성암 불사 이야기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 포교 법극 <이차돈의 사死> / 신라 최초의 순교자, 이차돈 / 월송스님은 신라 화랑의 후신 / 수덕사의 통알
7부 열반을 향하여
일엽스님의 초상화 이야기 / 완전한 열반 / 한 줌의 유골 / 최초의 비구니 선사 / 미래세를 위한 김일엽문화재단의 설립
8부 영화 <비구니>
월송스님과 배우 김지미의 인연 / 반세기가 지나서야 / 일타스님의 중재, 극적인 화해와 화합 / 천하의 몹쓸 비구니
◼ 에필로그 나의 스승 일엽스님
◼ 새 문집을 펴내며 <일엽선문> 후기
발행일 | 2024. 10.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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